진태 · 증명할 수 없는 시간
연습대본 · 스릴러 · 남성 / 40대 · 감정선 웃음 → 공포
전체 대사
알리바이라... 참 딱딱한 단어네요, 형사님. 그날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제가 뭘 했냐고요? 음... 비가 왔잖아요, 그날. 저는 집 거실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볼륨을 꽤 높여서요. 빗소리랑 그 무거운 현악기 소리가 섞이는 게... 참 기가 막히거든요. 창가에 앉아서 와인을 한 잔 마셨죠. 아주 붉고... 끈적한. 근데 형사님. 보통 진짜 살인범들은 알리바이를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나요? 식당 영수증을 챙긴다거나, CCTV에 일부러 얼굴을 비춘다거나. 저처럼 '집에서 혼자 와인 마시며 음악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살인범이 있습니까? 그건 너무 멍청하거나... 아니면 진짜로 아무 죄가 없어서 꾸며낼 말이 없거나. 둘 중 하나겠죠. 형사님 표정을 보니까, 전자로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제가 그 여자... 아니, 피해자랑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라서 그러시죠? 맞아요. 제가 밤 10시 45분쯤에 전화했습니다. 빌려준 책을 돌려달라고 했거든요. 아주 평범한 이웃의 대화였죠. 아, 기사 보니까 수법이 아주 잔인하던데. 스물네 번을 찔렀다면서요? 목에는 빨간 실크 스카프가 감겨 있었고. ...왜 그러세요? 아, 빨간 스카프는 기사에 안 나왔나요? 이상하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제가 주워들었나 봅니다. 뭐, 아무튼. 형사님. 사람의 살갗을 뚫고 들어갈 때... 칼끝에 어떤 저항감이 느껴지는지 아십니까? 아, 오해는 마세요. 제가 찔렀다는 게 아니라, 제가 평소에 스릴러 소설을 참 좋아해서요. 그냥 상상해 본 겁니다. 그 따뜻하고 비릿한 것이 손을 타고 왈칵 쏟아져 내릴 때... 피해자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겠죠. '왜 날 죽이냐'는 원망보다는, 그저 짐승 같은 공포만 가득한 그 눈빛. 자, 제 알리바이의 마지막 조각을 드릴게요. 새벽 1시 반쯤, 제가 집 앞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나갔습니다. CCTV 확인해 보세요. 제가 우산을 안 쓰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을 겁니다. 왜 우산을 안 썼냐고요? 씻어내야 할 게 좀 있었거든요. 아주... 지독하게 안 지워지는 것들. 물론, 흙탕물 얘기입니다. 자, 제 알리바이. 이 정도면 증명이 됐습니까?
